
「추억은 모두 겨울 눈에 묻어두고 절대 돌아보지 말자-」
겨울의 추위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시련이다. 곰은 겨울을 나기 위해 긴 잠을 자고, 새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문명을 구축한 인간에게도 추위라는 고난은 공평하게 다가온다. 동면하거나 서식지 이동을 하지는 않지만, 살을 에는 추위와 짧아진 낮 탓에 인간은 외로움을 느꼈다. 킨키 지방 어느 산속에 있는 ‘인술학원’의 한 학생도 추위와 함께 난생처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춥다.”
두더지.... 아니, 4학년 이반 작법위원회 소속 아야베 키하치로는 함정 파기를 멈추었다. 고양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천성 탓에 막 내리기 시작한 눈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눈이 녹으면 땅이 질퍽해질 테니까. 신난 하급생들이 곧 떼거리로 몰려와 함정을 파는 데 방해될 테니까. 절대 아야베 키하치로의 머릿속에 하쿠젠 카이토가 생각난 탓은 아니다, 절대로. 키하치로는 괜스레 언짢은 기분으로 상세히도 그려져 가는 제 머릿속 카이토의 얼굴을 애써 묻었다. 그럼에도 아야베는 인술학원 어딘가에 있을 동급생을 찾아 나섰다.
“하쿠젠 군이라면 아침 식사 시간밖에 못 봤는데-”
탐정 아야베의 첫 번째 추리, 실패. 카이토는 아야베를 위해서 자주 식당에서 우동을 끓여주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대부분 냉우동이었지만, 오늘처럼 추운 날이면 함정에서 키하치로를 끄집어내어 함께 따뜻한 우동을 먹었다. 우동가게 장남이 끓여주는 우동은 기복 없이 맛있지만, 카이토와 함께 먹었을 때의 우동은 특별히 맛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다.
“키하치로, 마무리하고 들어와. 우동 다 됐어.”
“우동을 주문한 적은 없는데.”
“눈도 오는데 이제 쉬자. 벌써 저녁 시간이야.”
아야베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이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출출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함정을 파는 데 너무 열중해서 점심도 잊고 있었다.
“배고파.”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식당으로 가자.”
그때 카이토의 표정이 어땠더라. 웃고 있었던가.
“하쿠젠이라면 오늘 도서실에 안 왔어.”
두 번째 추리, 역시 실패. 아직 익숙지않은 특기 무기를 나카자이케 선배에게 질문하러 왔을 거라고 쉽게도 예상했다. 아야베는 오늘의 도서실 당번이 나카자이케 선배이고, 그에게 질문하기 위해 하쿠젠이 도서실에 방문했을 거라 한 번에 두 가지 추리를 했으나 다 틀렸다. 오늘 당번은 5학년 로반의 후와 라이조이고, 하쿠젠은 도서실에 오지 않았다. 아야베는 어쩐지 패배한 기분으로 꽤 오랜 경력의 탐정이기도 한 1학년 하반의 란타로에게 물어보려 발걸음을 옮기던 차에,
“하쿠젠에게 가는 거라면 이걸 전해줘.”
“책입니까?”
“응. 남만의 서적인데, 줄표창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나카자이케 선배가 전해주라 하셨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도서실을 빠져나온다. 아야베 키하치로가 후와 라이조에게 받았지만, 나카자이케 쵸지가 하쿠젠 카이토에게 빌려주는 책이다. 기묘한 기분으로 표지를 훑어보니 장난감으로 선보일 수 있는 묘기 기법에 관한 책이었다. 과연 도움이 될까 싶어 내용을 대충 훑어보는데, 장난감이어도 확실히 줄표창을 다룰 때 응용시킬 수 있을 만한 기술이 많이 실려있었다.
“이건 뭐라고 읽는거지....”
아야베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카이토는 남만어를 읽을 수 있던가? 못 읽었던 것 같은데. 근데 내가 왜 심부름까지 해주고있는거야.... 당사자 없는 불평은 쌓이고 쌓여, 땅을 하얗게 칠해버린 눈에 덮여간다. 내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주제에 막상 찾으면 보이지 않는다. 다가가면 시큰둥한 얼굴이 붉게 물드는데, 정작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다. 난 혼자가 익숙한데 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다.
“....짜증나.”
마무리한 함정을 다시 파기 위해 삽을 들고 안뜰로 나섰다. 함정을 파며 위치를 이동하지 않았으니, 안뜰은 트랩으로 이루어진 미술관과 다름없으랴. 남겨둔 함정의 표식조차 눈에 덮여서 보이지 않을 테니 하급생들이 많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함정을 파기보다는 구조를 해야 할지도. 함정에 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아야베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 그럼, 먼저....
쿵!
본인이 판 함정에 떨어졌다. 위치나 깊이를 보면 아마 오늘 처음으로 판 함정일 것이다. 일단 후미코는 안부러졌고.... 분명 함정 표시는 해뒀는데-
“표식이 눈에 덮였나보네....”
“키하치로?”
“카이토....”
드디어 카이토를 찾았다. 찾은 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야베는 드디어 하쿠젠을 만났다. 하루의 반나절을 소모하게 한 장본인을 만났으나- 기쁘기보다 황당함이 먼저 앞섰다.
“편지? 함정 안에서?”
“응. 키하치로의 함정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타카마루 씨도 내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하셔서-”
“타카마루 씨가?”
“응. 타카마루 씨께 편지를 쓰다 보니 4학년 모두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서 쓰고 있었는데.... 우왓! 왜 옆으로 오는 거야?!”
“오야마-.”
빨개진 얼굴로 한숨을 쉬면서도 하쿠젠 카이토는 아야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사람에게 익숙한 행동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차가운 겨울과 대비되는 따뜻한 그의 체온이 짜증 낼 마음마저 녹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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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엔 생사조차 모르게 될 소중한 내 친구. 운이 좋으면 너의 소식을 알 수 있겠지만, 어쩌면 너를 잃어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이 마음은 전하지 않고 덮어둘게. 네가 판 함정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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